HD현대일렉트릭 그린트릭과 유럽 '탈SF6' — 규제가 연 창의 크기
EU의 SF6 퇴출 규제가 만든 친환경 전력기기 교체 수요와, 개발 완료가 곧 수주는 아닌 이유
무슨 일이 있었나
HD현대일렉트릭은 전력망에 들어가는 변압기·차단기를 만드는 회사로, 매출의 대부분이 수출이고 그 중심은 북미다. 유럽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이었는데(2025년 매출의 약 10%), 최근 유럽을 겨냥한 친환경 제품 개발 소식이 잇따라 나왔다. 배경에는 규제가 있다.
유럽연합(EU)은 전력기기에 널리 쓰이는 절연가스 SF6(육불화황)를 단계적으로 퇴출하고 있다. SF6는 전기를 끊고 그때 생기는 불꽃(아크)을 잠재우는 데 뛰어나 고압 개폐장치의 표준 가스였지만, 온실효과가 이산화탄소의 2만 배가 넘는 강력한 온실가스다. EU의 불소계 가스(F-gas) 규정은 2028년부터 145kV 이하 개폐장치에서, 2032년부터는 그보다 높은 초고압 설비에서 SF6 같은 고온난화 가스 사용을 원칙적으로 제한한다.
이 규제는 유럽의 초고압 전력망 설비를 친환경 제품으로 갈아야 하는 교체 수요를 만든다. HD현대일렉트릭은 2026년 들어 그 수요를 겨냥한 제품을 잇따라 내놨다. 4월에는 400kV·460MVA급 변압기의 최종 승인시험을 마쳤다고 발표했는데, 기존 광유 대신 유출돼도 자연 분해되는 합성 에스테르 절연유를 쓴 제품으로 영국 전력망 운영사 내셔널그리드에 공급한다. 8월에는 SF6 대신 지구온난화지수(GWP)가 약 98% 낮은 혼합가스를 쓰는 420kV급 친환경 고압차단기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— 회사는 이를 국내 최초, 세계 세 번째라고 설명했다. 앞서 2024년에는 145kV급 SF6-Free 차단기로 스웨덴·핀란드에서 수주한 바 있다. 회사는 이 친환경 제품군에 ’그린트릭(GREENTRIC)’이라는 브랜드를 붙였다.
규제가 연 창, 그러나 좁을 수 있는 창
규제가 만드는 수요는 두 갈래로 읽힌다.
한쪽은 후발주자에게 열리는 기회다. 고압 전력기기 시장은 원래 오래 검증된 납품 실적을 가진 선진사(지멘스에너지·GE버노바·히타치에너지)가 보수적인 발주처를 상대로 지위를 굳혀온 곳이다. 그런데 SF6 금지는 그 실적의 상당 부분이 SF6 기반 제품 위에 쌓였다는 뜻이기도 하다. 모든 공급사가 친환경 기술로 제품을 새로 개발하고 다시 인증받아야 한다면, 선발주자가 쌓아온 우위의 일부가 리셋되고 후발주자에게 같은 출발선에 설 창이 열린다. 유럽 친환경 개폐장치 시장은 2030년 약 3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.
다른 한쪽은 그 창이 생각보다 좁을 수 있다는 점이다. 규제가 수요를 열어도 발주처의 보수적인 구매 관행은 그대로다. 게다가 420kV급 SF6-Free 개폐장치는 아직 유럽에서 누구도 실수주를 공개한 사례가 없는, 시장 자체가 이제 막 열리는 단계다. HD현대일렉트릭은 유럽 송전망 운영사의 사전적격심사(공급 자격을 미리 심사하는 절차)를 통과하고 영국 전력사와 장기공급계약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지만, 개발 완료와 자격 통과가 곧 수주는 아니다. 같은 시점에 효성중공업도 420kV SF6-Free 제품을 독자 개발해 스웨덴 공급 경험을 앞세우고 있어, 규제가 연 창을 두고 한국 업체끼리도 겨룬다. 그리고 유럽은 선진사의 홈그라운드다 — 이들이 안방에서 먼저 친환경 레퍼런스를 쌓으면 창은 다시 좁아진다.
무엇을 봐야 하나
이 갈래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는 몇 가지가 가른다.
첫째, 첫 실수주가 언제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다. 420kV SF6-Free 제품의 유럽 첫 수주는 개발 경쟁이 실제 매출 경쟁으로 바뀌는 지점이다. HD현대일렉트릭이든 효성중공업이든, 누가 먼저 유럽 송전망 운영사의 확정 발주를 받아 운용 실적을 쌓기 시작하는지가 이후 몇 년의 판도를 가른다.
둘째, 영국 내셔널그리드에 공급한 에스테르 절연유 변압기가 일회성에 그치는지, 반복 수주로 이어지는지다. 한 번의 공급 실적이 후속 발주로 연결되면 그 자체가 다음 수주를 여는 트랙레코드가 된다.
셋째, 유럽 매출 비중의 방향이다. 규제가 만든 수요가 실제 매출로 바뀌고 있다면 매출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몫(2025년 약 10%)이 올라야 한다. 개발·인증 소식은 이어지는데 유럽 비중이 제자리라면, 규제와 실적 사이의 시차가 그만큼 길다는 신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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